1. 실향민의 역사
함흥냉면의 남한 정착 사는 단순히 음식의 전래가 아니라, 한 세대의 아픔과 적응, 그리고 새로운 문화의 탄생을 상징한다. 6·25 전쟁 이후, 함경도 출신 피란민들이 서울 중구 오장동 일대에 정착하면서 냉면집을 열기 시작했다. 이들이 고향에서 먹던 냉면은 사실 ‘농마국수’ 혹은 ‘회국수’라 불렸고, ‘함흥냉면’이라는 명칭은 남한에서 새롭게 붙여진 것이다. 이는 실향민들이 고향을 잃은 아픔을 음식에 투영한 결과로, ‘함흥’이라는 지명은 그리움과 정체성의 표식이 되어 남한 사회에 뿌리내렸다.
오장동 함흥냉면 골목의 탄생은 1953년 ‘흥남옥’의 개업에서 시작된다. 이어 1954년 ‘오장동 함흥냉면’, 1957년 ‘신창면옥’이 문을 열면서, 이 세 곳이 오장동 3대 원조집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오장동은 중부시장과 인접해 있었는데, 이 시장 역시 함경도 출신 상인들이 건어물 상권을 형성한 곳이다. 시장과 냉면집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하면서, 오장동은 실향민의 애환과 고향의 맛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오장동 함흥냉면집의 주방장과 종업원들도 대부분 함경도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각자 고향에서 배운 방식대로 냉면을 만들었으나, 남한의 재료와 환경에 맞게 조금씩 레시피를 변형했다. 예를 들어, 함경도에서는 감자전분이 주재료였지만, 남한에서는 고구마 전분이 더 구하기 쉬워 자연스럽게 주재료가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남한식 함흥냉면의 쫄깃하고 투명한 면발을 탄생시켰다.
오장동 골목의 냉면집들은 서로 경쟁하며 각자의 개성을 발전시켰다. 어떤 집은 명태회 대신 가자미회나 홍어회를 고명으로 얹었고, 어떤 집은 양념의 단맛을 강조하거나, 육수의 깊이를 더했다. 이처럼 오장동 함흥냉면 골목은 단순한 음식 골목이 아니라, 실향민의 역사와 남한 사회의 변화가 교차하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2. 면발과 양념, 그리고 독특한 식문화
함흥냉면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쫄깃한 면발이다. 원래 함경도에서는 감자전분으로 면을 뽑았으나, 남한에서는 고구마 전분이 더 흔해지면서 고구마 전분이 주재료로 자리 잡았다. 이로 인해 면은 더욱 투명하고 탄력이 생겼다. 함흥냉면의 면은 일반 메밀면과 달리 삶는 과정에서 서로 달라붙기 쉬운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오장동의 일부 원조집에서는 비빔냉면임에도 불구하고 ‘간장 육수’를 함께 제공한다. 이 육수는 단순히 면을 풀어주는 역할을 넘어, 양념이 면에 고루 배도록 도와주고, 감칠맛을 더하는 숨은 조연이다.
함흥냉면의 양념은 고춧가루, 마늘, 설탕, 식초, 겨자, 참기름 등이 어우러진다. 특히 설탕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1960년대만 해도 설탕은 귀한 재료였으나, 오장동 냉면집들은 손님상마다 설탕 단지를 놓아두고 원하는 만큼 뿌려 먹도록 했다. 이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함흥냉면을 제대로 즐기려면, 면 위에 설탕을 넉넉히 뿌리고 식초와 겨자를 더해 초벌로 비빈 뒤, 마지막에 참기름을 두르는 것이 정석이다. 이렇게 먹으면 단맛, 매운맛, 고소함이 순차적으로 입안을 감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면수’의 부재다. 평양냉면집에서는 메밀면을 삶은 물인 ‘면수’를 따로 내놓지만, 함흥냉면집에서는 면수가 없다. 전분면을 삶은 물은 점성이 높고 맛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따뜻한 육수를 제공하는데, 이 육수 한 모금이 매운 양념의 자극을 순하게 만들어 준다. 어떤 집은 소고기 육수를, 어떤 집은 닭고기나 멸치 육수를 사용하기도 한다. 육수의 종류와 깊이 역시 집집마다 다르다.
함흥냉면의 식문화에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요소가 있다. 바로 ‘비빔’의 미학이다. 함흥냉면은 면과 양념, 고명을 완벽히 섞어 먹어야 제맛이 난다. 일부 마니아들은 젓가락 대신 비닐장갑을 끼고 손으로 비비기도 한다. 면발이 워낙 질기고 쫄깃해 젓가락만으로는 양념이 잘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함흥냉면은 먹는 방식마저 남다른 개성을 지녔다.
3. 고명의 변화
함흥냉면은 실향민의 정착지마다 다양한 변주를 낳았다. 부산에 정착한 함경도 출신들은 밀가루와 고구마 전분을 섞어 ‘밀면’을 만들어냈다. 밀면은 함흥냉면의 쫄깃함과 밀가루의 부드러움이 어우러진 독특한 면 요리로, 부산을 대표하는 별미가 되었다. 속초와 강릉 등 동해안 지역에서는 동해에서 잡히는 명태를 활용해 ‘코다리냉면’이 탄생했다. 코다리는 명태를 반건조한 것으로, 특유의 쫄깃함과 감칠맛이 냉면과 잘 어울린다. 이처럼 각 지역의 함흥냉면은 고향의 맛을 지키려는 실향민의 노력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창의성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고명(‘꾸미’)의 변화도 함흥냉면의 흥미로운 디테일 중 하나다. 원래 함경도에서는 가자미회를 주로 사용했지만, 남한에서는 명태회가 더 쉽게 구할 수 있어 명태회가 표준이 되었다. 일부 집에서는 간자미(가오리) 회나 홍어회, 심지어 오징어회까지 고명으로 올린다. 고명의 변화는 단순한 재료의 차이 그 이상이다. 이는 실향민들이 고향의 맛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 맞춰 타협하고, 때로는 새로운 맛을 창조해 낸 과정의 산물이다.
오장동 함흥냉면 골목은 한때 20여 곳이 넘는 냉면집이 성업했으나, 평양냉면의 유행과 함께 지금은 몇 곳만이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장동은 여전히 함흥냉면의 성지로 남아 있다. 4대째 가업을 잇는 ‘오장동 흥남집’은 그 역사만으로도 남한 함흥냉면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함흥냉면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실향민의 아픔과 창조성, 그리고 남한에서 새롭게 꽃핀 음식문화의 상징이다. 이름부터 재료, 먹는 방식, 고명까지, 함흥냉면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와 디테일이 숨어 있다. 오장동 골목의 간장 육수, 설탕 단지, 그리고 고명의 변화까지, 함흥냉면은 그 속에 실향민의 역사와 남한 음식문화의 진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