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열무김치] : 정체성, 농민의 삶, 과학과 문화

by angelmom1 2025. 5. 5.

1. 정체성 - 여름의 생명력

열무김치
열무김치

어릴 적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나는 늘 할머니 댁 마당에서 열무김치 담그는 풍경을 지켜보았다. 외할머니는 아침 일찍 텃밭에서 연둣빛 열무를 한 아름 뽑아 오셨다. 그때마다 “열무는 잎이 부드럽고 뿌리가 가늘수록 맛이 좋아. 너무 자라면 질겨져서 김치 맛이 달라진단다.”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할머니는 열무 잎이 7장 정도 되는 것만 골라 오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예로부터 열무가 7 잎일 때까지는 공해에 오염되지 않은 상태라 건강에도 좋다고 여겼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다. 이런 세심함이야말로 열무김치의 깊은 맛을 만드는 비결이었다.

열무김치는 지역마다 담그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도 직접 경험하며 알게 됐다. 나는 군산에서 자랐지만, 대학 시절 부산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그 집 열무김치는 내게 꽤 낯설었다. 강원도에서는 열무와 얼갈이를 섞어 담그고, 국물이 맑고 시원한 반면, 부산에서는 양념이 더 진하고 국물이 붉고 칼칼했다. 친구 어머니께서 “이건 우리 동네 스타일이야. 여름엔 시원하게 먹어야 하니까 국물도 넉넉하게 잡고, 고춧가루도 아끼지 않아.”라고 하셨다. 같은 열무김치라도 지역마다, 집집마다 그 맛이 다르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그만큼 우리네 음식이 풍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2. 농민의 삶, 그리고 민요

내가 어릴 때 할머니는 텃밭에서 열무를 뽑으시며 “이게 바로 우리 집 여름 반찬이지. 옛날에는 배추가 귀해서 여름엔 이런 열무로 김치를 담갔단다.”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할머니는 밭일을 하시다가도 열무를 한 움큼 뽑아 오셔서, 그 자리에서 깨끗이 씻어 소금에 절이고, 쪽파와 홍고추, 마늘을 다져 넣어 김치를 담그셨다. 김치통에 담긴 열무김치는 하루 이틀 지나면 시원한 국물이 생기고, 그 국물에 밥을 말아먹거나 국수에 얹어 먹으면 여름 더위도 잊을 만큼 맛있었다.

경상북도 구미 지역에 전해지는 ‘열무김치’ 민요를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그 가사를 보고 나서야 왜 할머니가 “열무김치만 있으면 밥 한 그릇 뚝딱이지”라고 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가리 딱딱 벌려라 열무김치 들어간다/툭 수바리 장맛에 기름비도 모르고/육칠월에 보리밥 개떡 쪄서 맛 좋아/팔구월에 호박잎 쌈맛이야 말 못 해.

이 노래 가사처럼, 열무김치는 보리밥, 개떡, 호박잎 쌈 등과 함께 농촌의 여름 밥상을 풍성하게 해 주었다. 나 역시 할머니가 쪄주신 보리밥에 열무김치를 얹어 비벼먹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는 반찬이 부족해도 열무김치 하나만 있으면 든든했다. 열무김치의 시원한 국물과 아삭한 식감, 그리고 쌉싸름한 맛이 여름철 입맛을 살려주었고, 밭일로 지친 할머니의 피로도 덜어주는 듯했다.

3. 과학과 문화, 그리고 현대적 가치

할머니는 늘 “열무는 약이야. 여름에 땀 많이 흘리고 지칠 때, 열무김치 국물 한 그릇이면 힘이 나지.”라고 하셨다. 실제로 열무에는 비타민 C, 베타카로틴, 칼슘, 식이섬유가 풍부하다고 한다. 나는 어릴 때 그저 시원하고 맛있어서 먹었지만, 커서 자료를 찾아보니 열무의 쌉싸름한 맛은 시니그린(sinigrin)이라는 성분 때문이며, 이 성분이 항산화 작용과 해독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열무김치가 발효되면서 생기는 유산균이 장 건강에도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할머니의 말씀이 과학적으로도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무김치를 담글 때 할머니는 밀가루풀이나 찹쌀풀을 쑤어 양념에 넣으셨는데, 그 이유를 여쭤보니 “풀을 넣으면 양념이 열무에 잘 배고, 국물도 더 감칠맛이 나거든.”이라고 하셨다. 또, 열무김치에는 고추장이 아니라 고춧가루만 넣는다고 강조하셨다. “고추장은 너무 진해서 열무 본연의 맛이 죽어. 열무김치는 시원하고 담백해야 해.”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성인이 되어 자취를 시작하면서, 나도 직접 열무김치를 담가보았다. 시장에서 열무를 고를 때 할머니의 조언대로 잎이 연하고 뿌리가 가는 것을 골랐다. 집에서 밀가루풀을 쑤고, 마늘과 생강, 양파, 쪽파, 홍고추를 다져 넣어 양념을 만들었다. 절인 열무에 양념을 버무릴 때 나는 어릴 적 할머니 손길을 떠올렸다. 김치통에 담아 하루 이틀 실온에 두었다가 냉장고에 넣었더니, 시원하고 새콤한 국물이 생겼다. 그 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니, 어린 시절 여름방학의 추억이 입안에 퍼졌다.

열무김치는 한자로 ‘세청근저(細靑根菹)’라고도 불린다. ‘어린 푸른 뿌리로 담근 김치’라는 뜻이다. 김치의 ‘저(菹)’는 소금에 절이고 발효시켜 만든다는 전통 조리법을 의미한다. 일본의 ‘지(漬)’와는 구분되는 우리 고유의 방식이다.

오늘날에도 열무김치는 국수나 보리밥에 곁들여 먹는 서민적이고 소박한 음식이다. 여름철 입맛이 없을 때, 열무김치 한 그릇이면 밥 한 공기가 뚝딱 사라진다. 열무김치가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계절과 지역, 그리고 가족의 기억과 문화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직접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마무리하며

열무김치는 여름의 생명력과 농민의 손끝, 그리고 가족의 추억이 어우러진 음식이다. 할머니의 손맛에서 시작해, 지역의 다양성과 농민의 삶, 그리고 현대인의 건강까지 아우르는 열무김치는 그 자체로 한국 여름의 정수이자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내가 직접 열무김치를 담그고, 그 맛을 음미하며 느꼈던 경험은, 열무김치가 단순한 반찬을 넘어 우리 삶과 문화, 그리고 계절의 흐름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이처럼 열무김치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깊은 뿌리와 넓은 의미를 간직한, 여름의 생명력과 한국인의 삶을 오롯이 담은 특별한 음식이다.